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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아야 소피아(Hagia Sophia), 이스탄불, 튀르키예

by 뚜벅이C 2022. 4. 16.

 

2019년 12월 27일

2017년 터키항공 이스탄불 시티투어 때 내부 구경을 못 하고 그냥 지나가기만 해서 너무 아쉬웠었던

아야 소피아에서 이번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아침에 나와 보니 하늘은 잔뜩 흐렸고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던 아침이다.



내가 방문했던 때는 아야 소피아가 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시기여서 미리 구입해온 뮤지엄 패스로 입장했다.

 

 



아야 소피아, Ayasofya, Hagia Sophia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건설된 성당이다.

설계는 물리학자인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트랄리스의 안시미오스가 맡았으며,

1만 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하여 약 5년 10개월 만인 537년에 완공되었다.


지진과 화재로 인한 피해를 입을 때마다 재건되었고,

한때 성상 파괴 운동으로 수많은 조각상과 예술품이 사라졌다가 니케아 공의회 소집 이후 회복되었다.

그러나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로

아야 소피아를 비롯한 여러 성당의 각종 성유물들이 서유럽으로 반출되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아야 소피아도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아야 소피아를 보수하고 개조하여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했다.

나중에는 미나렛이 하나씩 세워졌고 1847년부터 약 2년 동안은 보수 공사도 진행되었다.


터키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935년에 아야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전환하면서 이곳에서의 종교행위도 금지했다.

하지만 2020년 7월, 터키 최고행정법원의 판결에 따라 아야 소피아는 모스크가 되었다.

 


 



버트레스

수백년이 흐르면서 돔과 성당이 부분적으로 파손되기도 했고

돔의 무게 때문에 기둥들이 바깥쪽으로 기울어져 외부에 버팀목을 세우기 시작했다.

버트레스는 건물을 바깥에서 지지해주는 장치를 말하는데,

아야 소피아의 버트레스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고 현재는 총 24개가 있다.

 

본당으로 들어서기 전 지나게 되는 2개의 회랑은 교회에 들어가기 전 기도를 준비하던 곳이다.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서는 문은 전부 9개다.

 

 

황제 전용 입구 모자이크

황제와 그의 경호원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는 거대한 문 위에 모자이크가 있다.

옥좌에 앉은 그리스도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은,

(오디오 가이드에는 레온 6세라고 나와 있지만) 레온 6세 또는 콘스탄티노스 7세로 추정된다고 한다.

왼쪽 원에는 성모 마리아가, 오른쪽 원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있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본당은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약 31m 직경의 거대한 돔은 바닥에서 무려 55.6m 높이에 얹혀져 있다.

돔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펜덴티브라고 하는,

돔의 무게를 4개의 아치로 받치고 또다시 4개의 기둥으로 지탱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올려다 보니, 그 아래 아케이드에 있는 40개의 아치형 창문이 보였다.

여러 창문으로 들어온 빛들이 서로 부딪히는 효과를 내 마치 내부 공간이 위에 떠 있는 듯한 효과를 낸다고 한다.

 

 

후진(apse) 모자이크

위쪽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모자이크가 있다.

성상 파괴 운동이 끝난 후 복원한 것으로 추정되며, 성모 마리아의 의자와 받침대 모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페르가몬 항아리

커다란 대리석 항아리가 입구 양쪽에 한 개씩 놓여 있다.

헬리니즘 시대에 제작된 것을 술탄 무라드 3세가 페르가몬 지역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1,250L의 물을 담을 수 있다는데, 주로 예배 중 사람들에게 음료를 나누어 주는 용도로 쓰였다.

 

 

옴팔리온

그리스어로 배꼽이라는 뜻이고, 이 내부 바닥은 세계의 중심을 상징한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즉위식 때 앉아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거대한 정사각형 안에 큰 원 하나가 있고 원 주변에 약 30개의 대리석 원형 타일들이 있다.

 

 

서예 원판

직경이 7.5m에 달하는 서예 원판은 총 8개가 있다.

19세기 압뒬메지트 1세 때 서예가 카자스케르 무스타파 이제트 에펜디가 도안했고,

알라, 무함마드, 정통 칼리파 4명(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알리의 아들 2명(하산, 후세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2층 갤러리에서는 본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으로 수없이 봐 왔던 바로 그 모습이다.

내부공사로 반쪽이 가려져 있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면서 내부의 모자이크는 회칠로 덮였었는데,

박물관으로 전환하면서 회칠 제거와 복원 작업을 거쳐 우리가 모자이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콤네누스 황제 모자이크

1122년에 만들어졌으며,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동로마황제 요하네스 2세 콤네누스와 황후 이레네, 아들 알렉시우스가 있다.

성모 마리아는 전통적인 비탄진 형식으로 그려졌고

황제는 근엄한 얼굴로, 황후는 헝가리인의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조이 여제의 모자이크

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양 옆에 조이 여제와 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가 서 있다.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돈자루와 조이 여제의 두루마리는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상징하는 것이다.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머리 위에 쓰여 있는 문구는

'콘스탄티노스,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은 경건한 황제, 로마인들의 왕, 모노마호스'라는 뜻이고,

조이 여제 위에 쓰인 문구는 '조이, 매우 경건한 황비'라는 뜻이다.

 

 

 

데이시스 모자이크

1261년에 만들어진, 아야 소피아에서도 유명한 모자이크다.

가운데 예수가 있고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이 있다.

'데이시스'는 애원, 간청이라는 뜻으로,

심판의 날을 맞은 인류를 위해 세례 요한과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간청하고 있다.

상당히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지만 인물들의 표정과 부드러운 색조가 뛰어나 아야 소피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2층에서 올려다본 모습.

 

 

 

소원의 기둥

구멍 뚫린 청동으로 감싸진 기둥이 하나 있는데,

1200년에 성 그레고리가 이 주변에서 기적을 일으켰고 그때부터 이 기둥이 축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축축한 이 기둥의 습기를 만지면 많은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구멍에 손을 넣어보려고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길.

 

 

 

두 번째 아야 소피아의 흔적

맨 처음 건립되었던 아야 소피아는 황후와 총대주교의 갈등 과정에서 군중들의 폭동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졌고,

재건된 두 번째 아야 소피아도 니카의 반란 도중 일어난 대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2사도를 상징하는 염소들이 새겨진 석재와 십자가가 새겨진 기둥 등 일부 흔적은 남아 있어 외부에서 전시되고 있다.

 

정면에서 찍어야 하는데 옆쪽에서 찍어 모양이 제대로 안 나왔다.

 

 


아야 소피아 분수

외부에 있는 이 분수는 1740년 마흐무트 1세에 의해 세워졌다.

물이 흐르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봤다.

 

 

 

점심을 먹고 다시 지나가게 되었는데 맑게 갠 하늘 아래 아야 소피아의 모습이 정말 예뻤다.

 

 

 

절대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동거를 보는 느낌이 묘했다.

지금은 다시 모스크로 전환되었지만 건축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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