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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by 뚜벅이C 2022. 12. 18.

 

2022년 12월 13일

 

몇 개월 전 합스부르크 전시회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10월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했었는데 벌써 12월이다.

잊고 지냈던 탓에 얼리버드 티켓은 못 샀지만 그나마 이 주일 전에 예매해서 이날 보러 가게 되었다.

 

 

거울못.

 

 

날씨가 추워서 매표소 앞에 천막을 설치해 놓은 모양이었다.

현장구매 줄은 왼쪽, 인터넷 사전예매 수령 줄은 오른쪽.

 

 

기획전시실 출입구 맞은편. 사람들이 여기에서 인증샷을 많이 찍었다.

 

 

15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예매한 시각 전에는 입장할 수 없다고 해서 잠시 기다렸다.

 

 

전시회 티켓.

 

 

기념품샵 옆에 사물함이 있어서 가방이랑 외투 다 여기에 넣어두고 폰만 가지고 들어갔다.

사용방법도 간단해서 소지품을 넣고 비밀번호만 누르면 끝이었다.

 

 

드디어 입장!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

 

* 기간: 2022.10.25. ~ 2023.03.01.

*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 가격: 성인 17,500원 / 청소년 15,000원 / 어린이 10,000원

 

오스트리아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과 애정을 바탕으로 특색 있는 예술품을 수집했다.

이 수집품들은 현재 빈미술사박물관에 남아 있으며,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매혹의 걸작들을 선보인다.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들은 15~20세기 합스부르크 왕가가 수집한 르네상스, 바로크미술 시기의 대표 소장품으로,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회화, 공예, 갑옷, 태피스트리 등 96점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틴토레토, 베로네세 등 거장들의 명화도 직접 볼 수 있다.

 


 

 

종이 리플릿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고, 동선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아 굳이 맵을 안 보고 다녀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왼쪽 아래 마름모꼴 구간에서 중간에 건너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유럽의 대표 가문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는

1273년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유럽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때때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918년까지 600여 년간 정치, 경제, 예술의 중심에 그들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역시 많은 예술가를 후원했으며,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엄청난 예술품을 수집했다.

그중에서 빈미술사박물관의 소장품 96점을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는 것이다.

 

 

본격적인 관람 전, 4가지의 카드를 가져갈 수 있게 꽂아 놓았다.

(원래 가득 꽂혀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순식간에 동나 버렸는데

똑 떨어지기 직전 잽싸게 겨우 챙겼고 사진은 나중에 전시관을 나와서 찍었다.

 

 

 

00. 프롤로그: 더 멀리, 합스부르크가의 비상

합스부르크 가문의 모토는 "더 멀리(Plus Ultra)"였다.

 

 

주요 인물들만 뽑아 놓은 계보도.

 

 

막시밀리안 1세 | 베른하르트 슈트리겔 원작을 모사 | 1508년 이전

150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한 막시밀리안 1세는 결혼 전략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동맹을 맺었다.

그 노력의 결실로 손자인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사상 최대의 영토를 물려받게 된다.

 

 

 

01. 황제의 취향을 담다, 프라하의 '예술의 방'

내성적이고 우울한 기질이었던 루돌프 2세는 정치에는 무관심했으나

예술과 과학을 좋아해 천문학, 점성술, 연금술 등에 빠져들었다.

그는 회화나 공예품뿐만 아니라 화석, 암석, 삽화 등 다양한 물건을 수집했고

수집품들을 '예술의 방(호기심 방)'에 전시했다.

 

 

(좌) 켄타우로스 에우리티온을 죽이는 헤라클레스 | 안토니오 수시니 | 1600년경

(우) 헤라클레스 | 16세기 후반

 

 

사실 전시실에 들어서면 갑옷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뜬금없이 여기에서 갑옷이 왜 나오나 싶지만,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갑옷은 남성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물건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니 갑옷도 수집품이었던 것이다.

 

 

(좌) 막시밀리안 1세의 갑옷: 기록으로 전하는 갑옷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우) 세로 홈 장식 갑옷: 뷔르템베르크의 울리히 공작이 실제 사용했던 것

 

 

(좌)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의 독수리 장식 갑옷: 총 90개의 부속으로 구성

(우) 루돌프 2세의 '리본 장식' 갑옷: 마상 창 시합용 갑옷

 

 

갑옷 입는 방법과 갑옷이 의외로 편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상.

 

 

루돌프 2세 | 마르티노 로타 | 1576-1580년경

그가 수집한 공예품은 빈미술사 박물관 공예관의 모태가 되었다.

 

 

누금 장식 바구니 | 16세기 후반

되게 작은 크기인데 가는 줄로 섬세하게 작업되어 있다.

루돌프 2세는 이 작품을 가장 특별한 예술품만을 모은 소장품집에 포함시켰다.

 

 

십자가 모양 해시계 | 1619년

이쪽 면에서는 일출과 일몰 시각을, 반대쪽에서는 세계의 시각을 측정할 수 있고,

측면은 그림자의 방향을 이용해 동쪽 수직 해시계, 서쪽 수직 해시계, 남쪽 수직 해시계의 기능을 했다.

 

 

마노 그릇 | 오타비오 미세로니 | 1615-1624년

오타비오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은 그릇 바깥면을 두르는 소용돌이 띠무늬와 정교하고 얇게 깎은 가장자리라고 한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이야기가 있는 접시 | 16세기 전반

16세기 포르투갈에서 유행했던 형식의 접시.

가장 바깥쪽은 아시리아에게 포위당한 유대 도시 베툴리아의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다.

남편을 잃은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뒤 목을 잘라 자신의 고향을 지킨다는 구약성경의 내용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전쟁 선포 | 한스 폰 아헨 | 1603-1604년경

루돌프 2세 당시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그림.

 

 

 

02. 최초의 박물관을 꾸미다, 티롤의 암브라스성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은 합스부르크를 대표하는 수집가로,

갑옷, 무기, 회화, 공예품 등 폭넓은 범위의 예술품을 대량 수집했다.

그는 티롤의 암브라스 성 내에 수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었는데,

직접 진열장을 설계하고 전시품의 위치를 지정했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 최초의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티롤의 현재 지명은 인스브루크이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 | 16세기 후반

 

 

야자열매 주전자 | 16세기 후반

지금 봐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생김새다.

전 세계에 야자열매 장식품이 6점 있다는데 이중 3점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집품이라고 한다.

 

 

우물가의 리브가와 엘리에셀 | 오타비오 바니니 | 1625-1626년경

강렬한 색채 때문에 눈길이 갔던 작품.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시종 엘리에셀에게 낙타 먹일 물을 주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고향 땅으로 가서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데려오라고 했다.

엘리에셀은 자신과 낙타에게 물을 주는 여인을 신이 정해주신 사람으로 생각하겠다며 기도했고

그 기도가 끝나자마자 리브가가 나타났다.

 

 

지식해적단의 합스부르크 가문 600년 역사 요약 영상이 여기에서도 재생되고 있었다.

전시회 오기 전에 나도 공식 사이트에서 이 영상을 보고 왔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촉각명화도 있었다.

만져보니 그림의 선을 따라 표면이 올록볼록했다.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에 있는 길이 17m, 폭 6m의 천장 그림에 대해 설명해 주는 영상.

모차르트의 41번 교향곡 '주피터'의 2악장을 들으며 영상을 시청할 수 있게 해놓았다.

 

 

인증샷 찍는 곳.

 

 

 

03. 매혹의 명화를 모으다, 예술의 도시 빈

17세기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집 안을 장식하는 다양한 장르의 회화가 발달한다.

이 지역이 상업의 중심지로 거듭나면서, 부유함을 과시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말년에 그동안 수집했던 회화를 가지고 빈으로 돌아왔고,

이후에도 합스부르크가 수집한 예술품들이 빈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현재 빈미술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카를 5세가 있는 메달 | 1535-1540년경

카를 5세가 1535년 튀니지를 정복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메달.

그는 조상을 잘 둔 덕에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은 역대급 행운아였다.

워낙 넓은 지역을 다스린 탓에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는 신성로마제국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는 스페인 왕국을 물려주었다.

이때부터 합스부르크는 스페인계와 중앙 유럽계로 나뉘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카를 5세의 공식 칭호. 외우기도 힘들 듯...

 

 

(좌) 스페인 왕 펠리페 4세 | 디에고 벨라스케스 | 1631-1632년

(우) 스페인 왕비 엘리자베트 | 디에고 벨라스케스 | 1631-1632년

엘리자베트는 펠리페 4세의 첫 번째 왕비. 두 초상화가 짝을 이루고 있다.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 디에고 벨라스케스 | 1656년경

포스터에 들어가 있다 보니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펠리페 4세와 두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났고,

훗날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22세에 단명했고 합스부르크 내에서는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포함해 어린 시절 사랑스운 모습의 초상화가 많이 남아 후대에 유명해졌다.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 얀 판 덴 후커 | 1642년경

평생 1,400여 점이 넘는 회화를 수집했고, 여기에 당대 최고의 명화들이 포함되어 있다.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의 브뤼셀 화랑 | 다비드 테니르스 2세 | 1651년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컸다. 모자를 쓴 인물이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맨 위 왼쪽에서 두 번째 그림을 눈여겨보자.

 

 

동방박사의 경배 | 파올로 베로네세 | 1580-1588년

좀전에 브뤼셀 화랑에 나왔던 바로 그 그림이다.

아기 예수가 나이든 왕을 축복하고 있다. 옆에 터번을 쓴 사람은 무어인 왕.

 

 

갑옷을 입은 남자 | 틴토레토 | 1553년

창밖 바다에 떠 있는 군함으로 미루어보아

이 사람은 공화국 해군에 복무하며 해상 원정에서 부를 쌓으려고 했던 베네치아 귀족으로 추정된다.

그림이지만 갑옷에서 번쩍번쩍 광이 나는 것 같다.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 페테르 파울 루벤스 | 1620-1625년경

독립된 작은 방에서 전시하고 있던 루벤스의 그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들으며 그림을 감상할 수 있고

옆면에는 그림을 설명하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나그네로 변장한 신들은 집집마다 문전박대를 당하다가 이 노부부한테서만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노인은 손님에게 준 포도주가 줄어들지 않자 그들이 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마리 남은 거위마저 잡으려 하자 주피터가 손을 들어 저지하고 있다.

 

 

중간에 꽃그림만 모여 있는 방이 있었다.

 

꽃다발을 꽂은 파란 꽃병 | 얀 브뤼헐 1세 | 1608년경

얀 브뤼헐은 정물화에 잘 나오지 않는 검은 붓꽃을 종종 그렸다고 한다.

아래에 꽃잎과 벌레들이 떨어져 있는데 언뜻 보면 진짜 같다.

 

 

바람난 신부를 둔 신랑 | 얀 스테인 | 1670년경

제목 때문에 사람들이 한 번씩 웃고 가는 얀 스테인의 풍속화.

신랑은 지푸라기 몇 가닥이 꽂힌 초라한 모자를 쓰고 있고,

신부의 불룩한 배에 손을 얹고 있는 아이의 짓궂은 표정을 보니 신부가 정말 바람났나 보다.

 

 

<승리> 연작 | 안드레아 만테냐의 제자로 추정 | 1598년 이전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안드레아 만테냐가 승전 장면을 연작으로 그렸는데,

만테냐의 제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그 그림들을 작은 크기로 모사한 것이다.

당시 판화 덕분에 만테냐의 작품이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사냥한 새 | 얀 페이트 | 1641년 이후

메추리, 자고새, 피리새, 오색방울새, 되새, 푸른박새, 종달새 등 다양한 종류의 새가 그려져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사냥이 고급 취미로 유행했는데,

귀족과 신흥 부르주아 계층은 부유함을 과시하려고 사냥 그림으로 집을 장식했다.

 

 

아침 식사 | 코르넬리스 데 헤엠 | 1660-1669년

색감도 예쁘고 과일이 너무 상큼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빛 받는 부분들도 그렇고 거의 사진 수준으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신기했다.

 

 

 

04. 대중에게 선보이다, 궁전에서 박물관으로

1740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인 카를 6세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올랐다.

여성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없었기에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황제가 되었지만

권력의 정통성에 있어서는 혈통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고

따라서 대부분의 실권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지고 있었다.

남편이 사망한 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장남 요제프 2세와 공동 통치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을 벨베데레 궁전으로 옮겨 전시하고자 했으며,

요제프 2세 때 드디어 궁전을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하게 된다.

 

 

마리아 테레지아 | 마르틴 판 마이텐스 | 1745년경

카를 6세의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합스부르크 왕가는 남성 혈통이 끊어졌다.

그러나 카를 6세는 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여성 상속자만 남는 경우를 대비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랜 기간 치러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녀는 16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임신한 상태에서도 밤새 술을 마시고 춤추며 놀았고 여성 마상 창시합을 선보이기도 했다.

 

 

요제프 2세 | 요제프 히켈 | 1785년경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모두 오스트리아에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추구하는 방식이 워낙 달랐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대립했다.

요제프 2세는 10년에 불과한 짧은 치세에 다양한 개혁들을 추진했으나

급진적인 그의 정책은 주변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결실을 보지 못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 | 요한 카를 아우어바흐 | 1773년

1766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열린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과 작센 공작 알베르트의 약혼을 축하하는 공식 연회 모습이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애칭은 "미미".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과 생일이 똑같은 딸 미미를 가장 아꼈고,

딸을 가까이 두려고 알베르트를 헝가리의 섭정으로 삼았다.

 

 

옆에 이 그림을 설명해주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 | 1778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독일식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동맹을 맺기 위해 열네 살 때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결혼했다.

프랑스로 시집온 뒤 온갖 악성 루머에 시달렸는데

당시 퍼져 있던 대부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셔벗용 식탁 장식 | 1736-1740년

카를 6세 황제의 황후가 소유했던 것이다.

고리 끝 장식에 새겨져 있는 초상은 황제 부부와 세 딸, 그리고 사위 프란츠 슈테판이다.

 

 

잔세트와 세면도구 | 안톤 마티아스 도마네크 | 1750년경

총 70여 점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침 식사용 식기와 세면도구의 일부.

순도 높은 금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프란츠 2세 | 요한 조파니 | 1775년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프란츠 2세)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프란츠 1세).

이 초상화는 할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주문해서 그린 것이다.

 

 

정면에 엄청나게 큰 태피스트리 2개가 걸려 있었다.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 바울 | 디자인: 라파엘로 산치오 | 제작: 야콥 괴벨스 1세 | 1600년경

판 앨스트가 바티칸 궁을 위해 만든 태피스트리의 여러 복제품 중 하나이다.

 

 

기적의 물고기 잡이 | 디자인: 라파엘로 산치오 | 제작: 야콥 괴벨스 1세 | 1600년경

예수가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인 베드로와 안드레를 도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준 기적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후 어부들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

 

 

나폴레옹 1세 | 안드레아 아피아니 | 1805년

합스부르크 사람들 초상화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나폴레옹이 나온다.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이 1804년 스스로 프랑스 황제에 오르자

나폴레옹과 격을 맞추기 위해 오스트리아 황제로 즉위했다.

1806년 프란츠가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프란츠 2세는 프란츠 1세가 되었던 것이다.

 

 

 

05. 걸작의 집대성, 빈미술사박물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68년간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렸다.

그는 수도 빈의 도시 확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링슈트라세를 만들고 이 도로를 따라 건축물들을 짓게 했다.

빈미술사박물관도 이때 건립되었다.

 

 

(좌) 프란츠 요제프 1세 | 미하이 문카치 | 1896년경

(우) 엘리자베트(시시) 황후 | 요제프 호라체크 | 1858년

시시는 1년이 넘도록 남편과 헝가리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재자 역할을 맡았고 협상 타결을 결심하도록 도왔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에게 살해되었는데 코르셋을 풀기 전까지 찔린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시시의 유언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였다.

 

 

스테파니 황태자비 | 한스 마카르트 | 1881년

스테파니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들 루돌프와 결혼했다.

루돌프가 연인 마리 베체라와 동반 자살한 후 재혼해 헝가리에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러시아군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제복 | 안톤 우첼 & 존 | 1907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중 제국 시기 육군 최고 사령관이었고

상황에 따라 독일과 헝가리 군복을 번갈아 입었다. 이 제복은 헝가리식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탈리아 화가 베르나르도 벨로토에게 그리게 한 빈의 풍경화들을 커다란 영상으로 보여주던 곳.

18세기 빈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06. 에필로그: 더 가까이, 오스트리아에 전한 조선의 마음

1892년 조선은 오스트리아와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수교를 맺으며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로 보냈던 조선의 갑옷과 투구.

 

루돌프가 자살하고 다음 황위 승계자는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가 되었다.
그런데 카를 루트비히는 성지 순례에 나섰다가 이질에 걸려 죽고 말았고,
결국 카를 루트비히의 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후계자가 된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강경한 개혁 정책을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자들의 반감을 샀다.
이로 인해 보스니아 사라예보를 방문한 페르디난트 부부는 암살당하고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관람이 끝났다.

 

 

마지막에 나만의 작품집 만들기가 있었다.

 

 

전시관을 나와서 기념품샵도 한 번 둘러봤다.

 

 

 

전시품이 100점도 안 되니 관람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예상 시간은 2시간 정도였는데 실제로는 3시간이나 걸렸다ㅜㅜ

제한된 인원만 정해진 시간대에 입장시키고는 있지만,

작품 수는 한정적인 반면 사람은 너무 많아서 곳곳에 정체 구간이 생겼다.

 

생소한 화가의 작품이 많기는 해도

루벤스, 벨라스케스, 틴토레토 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좋았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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